납품 늦으면 1000억 토해내란 정부···'수퍼을' 방산업계 비명
- 작성일2020/05/21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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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2020.05.21
A업체가 만드는 제품은 기획도 고객사가 하고, 생산원가도 고객사가 정해준다. 기술을 개발해 원가를 줄여도 아낀 비용만큼 고객사에 반납해야 한다. 고객사 기획안대로 만들다가 문제가 생겨 납기가 늦어지면, 이유를 막론하고 하루 단위로 벌금을 내야한다. 1년이면 계약액의 30%가 날아간다. 수백 곳의 협력 업체와 일하지만 단순 실수든 협력업체 잘못이든 모두 A업체 책임이다. 그러다 ‘부정업체’로 지정되면 모든 입찰이 막힌다. 억울해도 이 고객사 말고는 물건을 팔 곳이 없다. ‘수퍼 갑’과 ‘수퍼 을’ 관계다. 여기서 고객사는 한국 정부, A업체는 방위산업체(방산업체)다.
수출 급감, 매출 역신장 경영 위기
K-11 소총 정부가 설계 바꿔놓고
납품 늦자 계약액 두배 1000억 벌금
잘못하면 입찰제한 등 제재 덤터기
막상 소송하면 정부 패소율 55%
‘방산 강국’ 기로…2년 새 수출 35% 감소
국내 방산업계가 내수와 수출 양축이 무너지며 경영난에 고심하고 있다. 제조업·수출 강국 한국경제에서 이례적인 ‘퇴보’ 추세다.
19일 국방부와 방위산업진흥회(방진회)에 따르면 국내 10대 방산업체 매출은 2016년 11조4000억원에서 2018년 10조4000억원으로 9.6% 쪼그라들었다. 수출은 35%나 급감했고, 종사하는 인력도 5.3% 줄었다. 영업이익률은 4.3%로 제조업 평균인 8.5%의 절반 수준에 그친다. 일반적인 산업이라면 존폐의 기로에 선 성적표다. 방진회는 방위산업 육성을 위해 정부와 방산업체간 교량역할을 하는 방위사업청 소관 비영리 법인이다.
방진회가 취합 중인 지난해 경영지표 역시 정체 또는 하락세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익을 내고 싶어도 여지가 없다”는 게 방산업계의 공통된 하소연이다. 정부가 지정한 방산업체는 현재 87개. 코오롱데크·풍산·현대로템·S&T모티브·대우조선해양·현대중공업·한화시스템·한국항공우주산업(KAI)·LIG넥스원 등이 대표적이다.
업체들 ‘억울하다’ 줄 소송에 날 새는 방산업계
방산업계가 경영악화의 원인으로 꼽는 가장 큰 애로는 산업의 특성을 반영하지 못한 과도한 제재다. 방산은 고도의 연구·개발(R&D)과 정밀한 제조 과정을 거치는 첨단 기술 산업인데도 일반적인 정부 상용품과 똑같이 국가계약법상 규제를 받는다. 단순한 행정착오가 비리로 해석되거나, 현실을 반영하지 않고 징벌이 주어지는 사례가 상당하다. 대표적인 사례중 하나가 납기 지연 벌금인 ‘지체상금’ 이다.
특히 부정행위 업체에게 불이익을 주는 ‘부정당업자’ 처분을 받으면 입찰제한, 부당이득금·가산금 환수, 착수금·중도금 지급 제한, 이윤 감액, 입찰감점 등 10여 개의 중복 제재가 한꺼번에 온다. 정부가 유일한 수요처라 한번 처분을 받으면 타격이 심각하다.
일례로 KAI는 지난 2월27일부터 5월13일까지 75일간 국내 공공기관 입찰 참가가 금지됐다. 한국형 기동헬기인 ‘수리온’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협력사들이 시험 성적서를 위·변조했다는 이유로 방위사업청(방사청)이 부정당업자 처분을 내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업계 관계자는 “영세 협력사들이 부품이 문제없다는 증명을 받는 데 드는 비용이 부품 납품가의 3배에 달한다”며 “증명 과정을 현실화하지 않으면 비슷한 일이 계속 일어날 것”이라고 지적했다.
K-11 복합소총을 만드는 S&T모티브는 정부의 설계 변경 탓에 납품이 늦어졌는데도, 계약 규모의 두 배가 넘는 1000억원이 넘는 지체상금을 부과받기도 했다. 미국과 유럽 선진국들이 첨단기술 개발의 어려움을 고려해 지체상금을 면제해주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방산업체 관계자는 “필연적인 추가 비용이나 실패 비용을 인정해 주지 않으니 아예 처음에 원가를 높게 잡게 된다”며 “비용을 더 들여 만들어야 이익률이 유지되는 아이러니한 업계가 바로 방산업계”라고 씁쓸해 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정부와 방산업체 간 소송이 1년에 평균 60건을 훌쩍 넘어 ‘방산전문 로펌 배만불리고 있다’는 말까지 나온다. 방산 소송의 정부 패소율은 55%다. 그 만큼 제재가 과하다고 풀이할 수 있다.
방산은 비리의 온상? 소통막는 ‘주홍글씨’
이런 엄격한 규제 배경엔 방산업체들은 엄격히 관리·감독하지 않으면 비리를 저지른다는 ‘방산비리’ 프레임이 깔려있다. 한국형 전투기 사업(KFP)에서 발생한 율곡비리(1993년), 로비로 결함있는 미국 장비가 선정된 린다 김 사건(1996년), 터키 공군 장비 도입을 중개하면서 납품가를 부풀린 이규태 일광공영 회장 사건(2014년) 등이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다. 하지만 이는 모두 해외 무기 도입 과정에서 오퍼상이나 에이전트들이 일으킨 것으로, 국내 방산 비리로 보기 어렵다는 게 일반적인 의견이다.
국군기무사령부 출신인 김한경 방위사업학 박사는 “무기체계는 개발부터 양산까지 기관 간 의견교환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정부와 업체가 소통을 하려고 하면 이걸 비리의 관점으로 쳐다보는 인식이 아직도 팽배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방위력 개선비 가운데 70%가 해외 업체에 가는 현실을 모두가 알면서도 이걸 개선하고 한국 방산을 육성하기 위해 구체적인 해결책을 찾고 고민하는 기관이 과연 있는지 의문”이라고 꼬집었다.
해외서 ‘그냥 그런’ 한국무기…왜?
방산업체들은 내수의 한계를 수출로 극복하려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다. 해외 방산 시장에서 한국 무기는 ‘미국이나 유럽보다 성능은 떨어지는데 가격은 싸지 않은’ 어정쩡한 제품으로 통한다. 십년 가까이 T-50 훈련기와 K-9 자주포 정도로 버티는 실정이다.
업계에선 정부가 처음부터 높은 성능을 가진 ‘완성형 무기’를 요구하고 있어 수출에 불리하다고 지적한다. K-2 전차 ‘흑표’의 경우 개발이 순조로웠지만 파워팩(엔진+변속기) 국산화 작업이 늦어지면서 양산 자체가 지연됐다. 현대로템이 개발한 53m 전술교량(전쟁시 다리가 끊어졌을 때 임시로 설치하는 다리)역시 작전 운용에 무리가 없었지만 군이 60m를 요구하면서 사업은 실패로 돌아갔다.
미국은 다소 결함이 발견되더라도 주기적 ‘성능 개량’을 통해 이를 보완하는 전략을 쓰고 있다. F-16만 해도 90년대 저성능 기종으로 평가됐지만 꾸준한 성능 개량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전투기가 됐다.
애초에 ‘국내용’ 중심으로 무기를 만들기 때문에 해외 시장 대응이 어렵다는 점도 문제다. 만약 방산업체가 해외 시장을 노리고 새로운 무기를 연구·개발할 경우 추가 비용은 모두 업체 부담이다. 방산업체 관계자는 “업체 주도로 개발을 하려면 평소보다 10~40%은 손실을 감수해야 하는데 편하게 정부가 하라는 대로 만들지 누가 도전을 하겠는가”라고 말했다.
국내 역차별 막고 유망 시장 공략해야
전문가들은 정보기술(IT)화, 스마트화하는 글로벌 방위산업 시장에 발맞춰 한국 방산도 ‘연구·기술개발 투자→수출확대→가동률·수익성 향상’ 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특히 방산 수출 활성화를 위해 '절충교역'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절충교역이란 무기를 수입할 때 반대 급부로 외국에서 기술을 이전받거나 국산 부품을 그 나라에 수출하는 방식의 무역이다.
한국과 방산 경쟁력이 비슷한 대만·이스라엘·터키·노르웨이 등은 계약금의 40%에서 많게는 100%까지 자국 기업을 위한 절충교역으로 활용한다. 하지만 방사청은 여러 나라가 입찰에 응한 ‘경쟁사업’에는 절충교역 비율 50%를, 한 국가와 바로 계약하는 ‘비경쟁 사업’에는 10%를 차등 적용하고 있다. 안영수 산업연구원 방위산업센터장은 “한국이 수입하는 무기의 65% 이상이 미국, 독일 등 상대국이 정해진 비경쟁 방식이라 다른 국가에 비해 국내 업체가 역차별을 받고 있다”며 “비경쟁 사업의 절충교역 비중을 최소 30%로 올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10여개 방산수출 유망 국가들을 선정해 ‘선택과 집중’ 전략으로 수출 시장을 공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 안규백 국회 국방위원장(더불어민주당)은 “방산은 성능으로만 보지 말고 국내 제품을 우선적으로 구매해줘야, 수많은 중소 방산 협력업체들이 살 수 있다”며 “국회 차원에서도 해외 대사·무관들과 교류하는 등 방산 수출을 위한 노력을 기울여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소아 기자 ls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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