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ARD 전문성과 책임감을 기반으로 ‘최상의 고객만족’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올해를 방산의 전환기로 - 숨 가쁘게 달려온 지난 50년
    • 작성일2020/04/07 09:18
    • 조회 380

    [아시아경제]

    2020.04.04

     

    올해를 방산의 전환기로- (1) 숨 가쁘게 달려온 지난 50년 

     

    1970년부터 본격적인 시동을 건 한국 방위산업은 올해 방산 50년을 맞이하는 중요한 터닝포인트가 되는 해를 맞았다. 사람 나이로 치면 50세는 공자가 쉰의 나이에 하늘의 명을 알았다고 한 데서 연유해 '지천명'이라는 비유적 표현을 쓰기도 한다. 그런 만큼 우리 방위산업은 50년 동안 비약적이고 획기적인 발전을 이룩하며 관련 산업계의 기술발전을 이끌어 왔다. 사업 구조면에서도 초기 OEM 생산방식 위주에서 벗어나 기술 국산화는 물론 해외 수출까지 사업영역을 다양화하고 확장해 왔다. 

     

     

    지난 50년간 눈부신 성장과 기술적 발전은 방위산업 진흥을 위해 노력해 온 수많은 관계자들의 열정과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지나온 발자취를 되돌아보면 우리 방위산업은 힘겹지 않았던 때가 없었다. 우리나라가 처한 지정학적 위치의 중요성, 북한과의 대립, 세계열강들의 이해관계로 벌어지고 있는 국제정치학적인 미묘하고 복잡한 관계들이 일련의 문제들을 불러일으킬 때마다 우리는 도전과 변화를 요구받았다.

     

    2016년 클라우스 슈밥이 다보스포럼에서 언급한 디지털 혁명을 기반한 초연결 ㆍ 초지능으로 대표되는 4차 산업혁명이라는 거대한 변화의 물결은 전 인류에게 새로운 도전의 시작을 알렸다. 이제 우리는 AI가 탑재된 로봇, 총알 없이 발사되는 레이저의 시대, 극초음속 미사일, 하늘ㆍ땅ㆍ바다에서 활약하고 있는 무인 스텔스 무기체계들을 더 이상 상상의 분야로 생각하지 않는다. 개개인의 생각과 철학, 이념은 물론 이러한 변화를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거대한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고, 미래는 우리 앞에 성큼 다가오고 있다.

     

    이미 시작된 거대한 변화의 물결은 이를 반대하거나 거부한다고 되돌릴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순응하고, 적응해야 한다. 따라서 앞으로의 50년을 위해 지금까지 발전을 이룩하기 위해 애써 온 노력들을 다시 돌아보고 혁신적인 방향으로 변신을 모색하고 구체적 실행 방안을 마련해야 할 시점이다.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미래를 구체적으로 설계하고 더 나은 방향으로 방위산업이 나아갈 길을 모색하기 위해 한국 방산의 지나온 과거를 돌이켜 보고, 다가올 미래를 위해 준비해야 할 사항을 점검해 보고자 한다.

     

    육군병기공창 창립 1주년 기념사진

    육군병기공창 창립 1주년 기념사진

     

    ▲방위산업 성장 위해 숨 가쁘게 달려온 지난 50년= 

    한국 방위산업의 태동기는 1970년에 시작되었다. 1969년 미국의 닉슨대통령이 '아시아 각국의 위기는 스스로 대처해야 한다'는 닉슨 독트린 선언이 결정적이었다. 당시 미국 내에서도 주한미군의 철수를 지지하는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기 때문에 우리의 자주적인 방위산업의 육성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었다.

     

     

    연간 국민총생산이 100억 달러에도 미치지 않는 경제적 상황에서 방위산업을 육성하기 위해서는 경제발전과의 병행을 목표로 시너지 효과를 노리는 방법 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초기 단계로 예비군의 무장화를 위한 기본병기 제작과 연구개발 사업을 중점적으로 육성하기 시작했다.

     

    방산 발전의 시대적 구분은 여러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이 글에서는 서우덕 고려대 교수가 구분한 4가지로 나누어 보았다. 먼저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 시기를 방위산업의 '태동과 기반조성기', 1980년대 전두환 정부 시기를 '시련과 도전의 시기', 노태우 정부 시기인 1990년대부터 김대중 정부의 2000년대 초까지 '안정과 성장의 시기', 노무현 정부가 들어선 2000년대 중반 이후 지금까지를 '경쟁과 도약의 시기'로 구분했다.

     

    ▲태동과 기반조성기(1970년대)= 우리나라에 방위산업이 뿌리내리게 된 계기는 박정희 대통령이 1970년 1월 9일 자립경제와 자주국방을 국정지표로 하는 연두 기자회견을 갖고, 1월 19일 국방부를 순시하는 자리에서였다. 이 때 방위산업 육성과 국방과학기술의 연구가 시급함을 강조하고, 2월 2일 국방부에 '방위산업 육성 전담부서'를 설치할 것을 지시하면서부터 국방부 군수국장 산하에 군수산업육성담당관실을 설치하여 방위산업 육성 및 지원에 관한 기본방침의 연구에 착수했다.

     

    1970년 한국 방위산업의 본격적인 시작에 앞서 육ㆍ해ㆍ공군의 발족과 대외 환경의 변화는 육군병기공창의 창설과 과학기술연구소 설치와 같이 방위산업에 씨앗을 뿌리는 역할을 하였다. 1945년 일본의 불법적인 점령으로부터 해방된 이후 우리 국군은 1946년 1월 미국식 군 조직 체계인 주 방위군 형태를 모티브로 삼은 국방경비대 창설을 시작으로 각 도에 1개 연대씩 총 9개 연대를 설치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더불어 국군조직법이 시행되면서 정식 육군으로 발족하게 되었다. 육군의 발족과 함께 당시까지 밀수 방지와 난파선 구조를 주 임무로 하던 해안경비대 역시 정식 해군으로 발족되었고, 이어 1949년 10월에는 총 병력 1,600명의 공군이 발족하면서 육ㆍ해ㆍ공군의 모양새를 갖추게 됐다.

     

    한국군이 겨우 군대의 모습을 갖추어 갈 무렵인 1949년 경, 미ㆍ소 양국의 냉전 갈등은 이미 한반도 지역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이미 남북 양측이 사상적으로 대립되는 각각의 독립 정부를 수립하고 있던 한반도는 적대적 대치상태에서 일촉즉발의 위협에 처해 있었다. 대부분의 물자와 기반을 미국에 의지한 채 독자적으로는 전차(당시 북한은 242대) 1대 보유하지 못한 열악한 수준에 머물러 있던 대한민국의 약소한 방위력은 그러한 위협을 더욱 심각하게 만들었다.

     

    미ㆍ소 양국의 군사적 지원에 있어서도 남북한의 격차는 점차 벌어지고 있었다. 당시 북한이 소련으로부터 공군 강화를 약속받고 중공과 방위조약을 맺은 반면, 미국은 오히려 한반도 내에서의 완전 철군을 고려하고 있었다.

     

    이러한 대외적 환경은 기술적ㆍ체계적 배경이 전무함에도 불구하고 정부로 하여금 군수ㆍ방산장비의 자체생산 체제구축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만들었다. 안보적 위협에 비하여 열악한 장비체계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우선 생산시설과 기술개발이 급선무였고, 이러한 필요에 따라 1948년 12월 15일 육군특별부대 산하에 '육군병기공창'이 창설되었다. 당시 가장 역점을 두었던 부문은 개인화기와 탄약의 생산능력을 보유하는 것이었다.

     

    이미 미군으로부터 인수받은 구 일본군의 조병창이 있었으나, 파손된 상태로 오랫동안 방치되었던 관계로 복구가 불가능하여 새로운 공장을 물색해야 했다. 이에 따라 국방부는 1949년 1월 15일, 정부 귀속업체인 유환상공주식회사의 용산공장과 조선유지주식회사의 인천공장을 각각 접수하여 제1, 2공장으로 지정하였다. 두 공장은 인수와 동시에 시설보완과 기계정비과정을 거친 후, 일본군 99식 소총의 부속품과 수류탄 제작에 착수했다.

     

    그 당시 미국은 '합동전략조사보고서'에 의거해 500명의 주한군사고문단과 부속요원만을 남겨둔 채 미군의 완전철수를 진행했다. 미군의 철수와 함께 군수물자들이 이양되었으나, 대부분 태평양 전쟁에서 사용된 노후된 구식 장비와 일본군의 99식 소총 등이 주력 장비였다. 장비의 내용으로 볼 때 무기 원조라기보다, 쓸 수 없는 장비를 두고 간 것뿐이라고 보아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 무렵 한국 정부에서는 북한이 20대 이상의 YAK 전투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미국에 폭격기를 포함한 항공기 원조를 요구하였으나, "남북간의 충돌"을 우려한 맥아더 원수의 거절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다시 한국 정부에서 대안으로 퇴역예정인 B-26 경폭격기 30대의 인도를 요청하자, 미국은 아예 30대 모두를 도끼로 파괴한 후 고철로 매각해 버렸다. 이렇듯 미국이 적극적 협조도 방치도 아닌 모호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 사이, 소련의 원조로 북한 장비는 점차 증강일로를 걷고 있었다.


    - 양낙규 기자 -